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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범수의 정공법] 여의도를 배회하는 유령, 비교섭단체

 

춥고 배고픈 비교섭단체


‘하나의 유령이 여의도를 배회하고 있다. 비교섭단체라는 유령이. 거대 양당과 보수 언론은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150여 년 전에 죽은 마르크스가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 선언하지 않을까? 

 

20대 국회에서 정의당 이정미 전 대표는 비교섭단체가 된 바른정당에게 “한 달만 지나면 얼마나 춥고 배고픈지 알게 된다”며 “비교섭단체는 유령 취급을 받는다”고 서러워했다.

 

21대 국회에서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기획재정위에서 배제되자 철야 농성을 하며 “기재위에 왜 배정되지 못했는지 설명은 없었다. 모든 상임위에 비교섭단체 의원이 1명뿐이라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22대 국회 개원 후 두 달이 채 안 된 7월,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우리 당은 12석을 보유하지만, 국회 운영에서는 0석 취급을 받는다. 민의에 비례한 국회 운영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20석 가져야 교섭단체


대체 비교섭단체는 무엇이길래 새 국회가 열릴 때마다 이런 하소연이 나올까? 국회법에는 비교섭단체라는 용어는 없다. 교섭단체의 반대 개념일 뿐이다. 비교섭단체는 교섭단체 규정을 통해서만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교섭단체는 국회에서 중요 안건을 협의하기 위해 일정한 수 이상의 의원이 구성한 단체이다. 흔히 ‘원내 교섭단체’라고 한다. 교섭단체는 정당이나 원내 단체에 속한 국회의원의 의사를 통합, 조정하고 정파 사이에 협상을 이끌어 국회 운영을 주도한다.  

  

국회법 제33조는 “국회에 20명 이상의 소속 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고 규정한다. 의원을 20명 이상을 가진 정당이나 단체가 교섭단체이다. 제22대 국회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뿐이다. 20명 미만은 비교섭단체가 된다.


<22대 국회 운영위원회 편람>에 따르면, 흔히 원내 대표라고 부르는 교섭단체 대표 의원은 국회의장과 국회 운영에 관한 사항을 합의하거나 협의할 권한을 갖는다. 합의 권한은 안건 심사 기간 지정, 투표 실시 등 8개가 있다. 협의 권한은 본회의장 의석 배정, 국회 기본 일정 수립 등 26개가 있다.

 

국회의장에 대한 제정, 요청, 추천, 통지 권한도 있다.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의 임면 제청, 상임위원회 위원 선임 등 6개이다. 이런 권한은 모두 교섭단체 대표가 갖고 있어 비교섭단체는 낄 자리가 없다.  


이에 따라 비교섭단체는 중요 입법이나, 예산안 등의 논의에 대부분 참여하지 못한다, 교섭단체가 본회의장 좌석 배치부터(국회법 제3조), 정기·임시국회·국정감사 등 국회 기본 일정(국회법 제5조의2), 본회의·대정부 질문 순서와 발언 시간까지(국회법 제122조의 2) 정하기 때문이다. 


비교섭단체는 상임위원회 간사도 가질 수 없다(국회법 제50조). 상임위원회 배분에서도 권한이 없다. 비교섭단체 의원의 상임위는 교섭단체가 협상하여 정한다(국회법 제48조). 그래서 알짜 상임위는 늘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차지한다.


지난 7월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은 "정보위에 지원했으나 국회법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공개했다. 김 의원은 "국정원이 지난해 한 번에 26,000 달러를 주는 등 수미 테리 미국 외교협회 연구원을 포섭했다. 이 자금으로 그는 워싱턴포스트 등에 윤석열 정권을 찬양하고 핵무장을 옹호하는 칼럼을 기고했다"며 "국정원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비교섭단체가 정보위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설을 연설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비교섭단체


매년 첫 번째 임시·정기국회가 열리면 교섭단체 대표는 연설을 한다. 비교섭단체는 원래 연설도 할 수 없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 3당이 항의하자 2005년에 처음 허용되었다(국회법 제104조). 명칭은 비교섭단체 대표 ‘발언'이다. 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다. 교섭단체 대표는 40분 간 연설하지만 비교섭단체 대표는 15분만 발언한다. 다 같은 연설인데 비교섭단체 대표는 ‘연설’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홍길동 신세다.


10석이 안 되는 비교섭단체는 자력으로는 법안 발의도 할 수 없다. 의원이 10명 이상 찬성해야 발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국회법 제79조). 실제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비교섭단체 의원의 법안은 회기 막바지에야 발의되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결정적으로 비교섭단체를 옭아매는 사슬이 있다. 정책연구위원 배정 규정이다.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정책연구위원은 교섭단체에만 둘 수 있다(국회법 제34조).

 

정책연구위원은 국민 세금으로 급여를 주는 별정직 공무원이다. 22대 국회는 1급 상당 8명, 2·3급 상당 37명, 4급 상당 32명 등 정책연구위원을 총 77명 두고 있다. 직급이 1~4급이면 고위직이다. 연봉이 1억원을 넘는 위원도 있는 정책 전문가이다.

 

정책연구위원 77명 중에서 민주당은 47명, 국민의힘은 30명을 배정 받았다.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은 단 한 명도 받지 못했다. 비교섭단체는 정책을 연구도 개발도 하지 말라는 얘기다. 거대 양당의 횡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51년째 요지부동 20석 


국제의회연맹(IPU)에 따르면, 2024년 7월을 기준으로 주요 선진국의 교섭단체 구성 기준은 독일이 32석으로 가장 많다. 이어서 이탈리아 20석, 프랑스 15석, 캐나다 12석, 스위스 5석, 일본 2석 순이다. 독일 연방의회 의원은 총 630명이다. 교섭단체 구성 기준인 32석은 전체 의원의 5.1%이다. 프랑스 의원은 모두 577명이다. 교섭단체 기준은 전체 의원의 2.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총 300석 중에 20석이므로 6.7%이다. 우리나라가 기준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8년에 제정된 첫 국회법에는 교섭단체 규정이 없었다. 1949년 개정된 국회법에서 ‘단체교섭회’를 규정하고 구성 인원을 20인 이상으로 했다. 1960년에 개정된 국회법은 10인 이상으로 완화했다. 5.16으로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963년에 개정한 국회법도 10인을 유지했다.

 

20인 이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면서 부활했다. 1973년 국회법을 개정하며 9대 국회부터 적용했다. 야당과 소수 정당의 입법 활동을 제한하려고 기준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거대 양당과 보수 언론

 


2004년 국회에 입성한 민주노동당을 시작으로 소수 정당은 꾸준히 기준 완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51년째 요지부동이다. 수십 년 동안 입법부를 교대로 장악한 거대 양당이 반대하고, 소수 정당을 불온시하는 보수 언론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거대 양당은 기준을 완화하여 다양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소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거부했다. 국회 운영을 독점해온 기득권을 내려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은 진보적 강령과 정책을 내세운 소수 정당의 목소리가 커지는 걸 원치 않는다. 이 지점에서 거대 양당과 보수 언론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22대 국회에서 비교섭단체는 조국혁신당(12석), 개혁신당(3석), 진보당(3석), 기본소득당(1석), 사회민주당(1석), 새로운미래(1석)이다. 비교섭단체를 포함하여 소수 정당은 지난 총선에서 비례대표 선거에서만 900만 표 넘게 득표했다.

 

국민은 다양한 민의를 반영하라고 국회로 보냈지만 거대 양당의 전횡과 보수 언론의 외면으로 비교섭단체는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국회 운영 전반에서 왕따를 면치 못한다. 900만 표를 던진 민심은 무시되고 왜곡되고 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야


교섭단체 기준 완화는 거대 기득권 양당의 선의에 기대어 해결할 수 없다. 보수 언론에게 애원할 수도 없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야 한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은 소선구제와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이라는 이중 장벽을 넘어 소수 정당을 국회에 보냈다. 


900만 표를 던진 유권자와 국민을 움직여야 한다. 비교섭단체 6개 정당은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 성명서와 SNS로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청원과 서명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집회와 시위, 천막 농성 등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한다. 그게 정치를 개혁하고 민심에 부응하는 길이다. 


마르크스를 패러디하며 칼럼을 마무리하겠다. 잃는 것은 사슬이요, 얻는 것은 여의도다. 전국의 유권자여, 단결하라!